[커피로드] 킬리만자로의 선물, 탄자니아 커피
아루샤 커피 로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커피 로지. 커피 농장이라기보다는 고급 숙박시설이다. 21개의 독립된 오두막 객실이 있는데, 방이 한 개인 오두막의 하루 숙박료는 250탄자니아실링이다.
탄자니아로 가는 길은 평탄하다. 탄자니아 국경을 넘나드는 미니버스는 드넓은 초원을 질주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떼들, 간간이 보이는 마사이족 원주민들, 그리고 찬란한 햇빛… 끝없이 펼쳐지는 대자연의 평화로움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마른 강바닥이 도로가 되어 뽀얀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길이 이어진다.
국경지역의 혼잡스러움을 뚫고 탄자니아의 고원도시 아루샤Arusha에 도착한다. 아루샤는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를 띠는 해발 1300m의 활기찬 도시로 킬리만자로 산Mt. Kilimanjaro(5,895m)에 이어 탄자니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메루산Mt. Meru(4,565m)을 앞마당으로 두고 있다. 수도 다르에살람Dar es Salaam과 함께 탄자니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는 도시다.
사파리 차 한 대를 빌려 인근의 커피농장으로 향한다. 현지인 운전수의 권유로 달려간 농장은 말이 농장이지 막상 도착해 보니 커피 로지Lodge로 불리는 한적한 고급 숙박시설이다. 안내원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21개의 독립된 오두막 객실이 커피농장 전체에 골고루 나누어져 있는 커피 로지를 둘러본다. 영국의 신혼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는 이곳은 잠시 전 도착한 아루샤 버스 터미널이 있는 떠들썩한 시내와는 전혀 다른, 아프리카 같지 않은 풍경이다. 삼엄하면서도 깍듯한 정문 경비며 친절한 직원들의 미소와 태도로 미루어 로지는 잘 운영이 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로지커피나무 |
로지커피꽃 |
그러나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되어 있는 로지의 분위기와는 달리, 가까이서 살펴본 커피나무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푸석한 흙먼지가 많은 마른 땅에 자라는 나무들의 수형, 잎의 상태를 볼 때 결과結果 수령樹齡1) 이 다른 곳에 비교해 늦고, 결과기가 되더라도 꽃눈의 형성이 불량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북한강가에 있는 나의 재배온실에서도 골머리를 앓게 하는 각종 커피나무병이 쉽게 눈에 띈다. 병충해 관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세계적인 관심사인 지속 가능한 농업의 의미는 이곳에서는 한갓 구호에 그치고 있는 듯 제초제 사용의 폐해에 대해서도 둔감하다.
커피 로지의 커피 나무는 땅이 습하고 나무 덩굴이 많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커피나무 아래에는 낙엽이 잔뜩 쌓여있다. 관리인은 이 낙엽이 자연스레 거름이 된다고 했으나, 어느 세월에 유기질 영양분이 될 지 의심스럽다.
나무 밑 둥에는 모아둔 잔가지와 낙엽들이 수북하다. 안내원은 모아둔 것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퇴비로 쓰이게 된다고 느릿느릿 답한다. 대개 밑거름으로 쓰이는 퇴비는 유기질을 주체로 한 지효성遲效性 거름으로 싹트기 전까지인 휴면기에 시비한다. 개화 후의 생장기에는 속효성速效性 화학비료인 덧거름이 필요한데, 아프리카의 부족한 강수량까지 감안한다면 그저 나무 밑 둥에 쌓아둔 잔가지와 낙엽들이 어느 세월에, 어떻게 퇴비가 되어 작용할 수 있을지 적이 미심쩍다. 농장관리 책임자를 만나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길 나누고 싶지만 자리를 비웠다니 도리가 없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 유지된다면 커피나무의 발육이 조화롭지 못해 경제수령은 짧아지게 되고 매해 생산될 커피체리의 품질은 점점 좋지 않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마음속 생각들이 다 말이 될 수 없지만 바람으로라도 전해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아루샤 커피 로지의 5월 수확기는 한 아름 커피체리의 기쁨으로 충만할 테지만 말이다. 커피 한 톨 나지 않는 곳에서 온 낯선 이방인의 짧은 식견은 장엄한 석양 속으로 이내 묻혀버리고 만다.
커피 로지 농장과 셰이드그로운 농장을 비교해보면, 셰이드 그로운 농장의 커피나무(오른쪽)가 열매를 훨씬 많이 맺고, 과실도 충실함을 알 수 있다.
커피 로지를 떠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길 건너 셰이드 그로운 Shade Grown 농장이 눈에 띈다. 급히 차를 세웠다. 이름 모를 열대의 아름드리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곧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그 아래로 커피나무들은 동서를 가로질러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평온한 모습이다.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저물기 직전의 힘없는 햇살이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짙은 초록의 영롱함은 더욱 눈부시다. 커피 로지의 커피나무처럼 키는 작지만, 수형이나 잎의 윤기는 같지 않다. 가지는 튼튼하고 탄력이 있으며 적과摘果를 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으련만 커피체리는 크기나 양 모두 충실하다. 농부의 수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농장이다.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는 두 농장에서 커피재배의 결과가 이렇게 확연히 다를 수 있다는 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 동네의 과수 농가도 집집마다 다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이치이지만, 일반 관광객들은 커피 로지의 커피를 전부로 알고 탄자니아 커피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것 같아 씁쓸하다.
킬리만자로의 관문, 모시
숙소 옥상에 새벽 동이 튼다. 6시가 넘자 여명이 밝아온다. 이른 시간인데도 교복을 입은 까만 빡빡머리 여중생들이 종종걸음으로 등굣길에 나선다. 새하얀 히잡Hijab을 둘러쓴 여고생들도 삼삼오오 지나친다. 자동차의 매연은 아프리카 도시 어디를 가나 비슷한가 보다. 이곳 아루샤는 좀 더 흙먼지가 많다. 자전거 행렬, 사방에서 울리는 활기찬 자동차 경적, 울부짖는 염소 소리로 부산하다. 먹구름이 메루 산에서부터 몰려오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되어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지만 우산을 받쳐 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잠시 건물처마 밑에서 수군거리며 기다릴 뿐.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빗속을 뚫고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 킬리만자로의 관문도시 모시Moshi로 향한다. 모시는 킬리만자로 남쪽 기슭, 해발고도 약 800m에 위치한 인구 15만 남짓의 작은 도시다. 차가Chagga족族과 마사이Massai족의 고향으로 일반인에게는 킬리만자로 등반코스의 출발지로 친숙하게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지역은 탄자니아 커피의 주 생산지로서의 의미가 큰 곳이다.
모시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발견한 커피나무. 울창한 바나나 나무 아래 커피나무를 심는 방식이 바로 셰이드 그로운이다. 다른 설비 없이도 일조량을 조절할 수 있다.
1시간 남짓을 달려 모시인근 작은 마을 마차메Machame의 한 교회에 다다른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좁은 길을 따라 현관까지 흙길을 간다. 여전히 비는 내린다. 뒤뜰 바나나 나무 밑에 묵묵히 자라고 있는 커피나무로 발길을 옮긴다. 어린 커피나무 100여 그루 남짓이 자라고 있다. 한 뼘의 틈이라도 있으면 한 그루라도 더심을 요량으로 빼곡히 심은 것이 우리 시골 할머니의 고추농사와 다를 게 없다. 케냐와 달리 소규모 경작이 많은 모시의 소박한 모습이다.
땅이 질척거린다. 화산성 토양임에도 불구, 배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여있는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강수량이 풍부한 이 지역의 기후가 토양과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최대의 휴화산인 킬리만자로는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힐로를 감싸고 있는 마우나케아Mauna Kea가 연간 강수량 3,000ml 이상의 많은 비를 내리게 하듯, 킬리만자로 산은 모시지역에 풍부한 강수량을 제공한다. 그러나 힐로 커피에 비해 월등히 높은 품질의 커피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많지 않는 강수량과 토질의 적당한 균형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가 많다는 것이 곧 좋은 품질의 커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모시의 토양은 화산성임에도 배수가 빠르지 않다. 이 지역의 풍부한 강수량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뒤뜰의 커피 나무가 잘 관리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며, 커피 재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야생의 커피나무는 품종이나 수확량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숙련되고 애정을 가진 이가 돌보는 커피 나무는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막대한 자본의 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킬리만자로의 선물, 커피
모시의 작은 마을에서 바라본 킬리만자로산은 너그러움이 스며있는 모습이다.
킬리만자로를 지척에 두고 있지만 비로 인해 위용만을 느낄 수 있을 뿐 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누군가는 “내게 떠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 곳에 꼭 가보고 싶다”고 도 했다. 무엇이 이토록 애절하게 킬리만자로를 찾게 하는가? 킬리만자로는 많은 이들에게 생이 다하기 전 언젠가는 반드시 가 보아야 할, 아름답지만 고독한 자신만의 이상향으로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상상 속의 아름다움에 편승해 일본의 커피업계에서는 언제부턴가 탄자니아 커피를 킬리만자로 커피로 칭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그렇게 불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이라던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탄자니아 사람들도 이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킬리만자로 산은 탄자니아 후손들에게 풍요를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고작 모시의 작은 시골 교회에서 그것도 먼발치에서 잠시 본 킬리만자로를 보고 뭐라고 말하는 건 온당치 않은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본 킬리만자로는 어떤 너그러움이 스며있다. 모시로 가는 길가의 경사면 커피나무에서도 잘 가꾸어진 나무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농부들의 지친 표정에서도 반짝이는 순박한 미소는 어디에서나 빛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맑은 미소를 생각할 때면 함께 킬리만자로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