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커피의 역사] 대불호텔과 손탁호텔

Posted on 2014년 11월 13일 Under archives

대불호텔과 손탁호텔 우리 나라 최초의 커피 판매점 왕실과 지배계층, 외국인을 중심으로 음용되던 커피는 차츰 상업적 판매의 길을 걷게 된다. 외국인과 신문물에 익숙한 조선인을 대상으로 서양의 식음료를 내놓았던 근대 서구식 호텔은 커피 판매에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대불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다는 기록이나 유물은 발견할 수 없지만 서양인을 대상으로 서양의 식음료를 제공한 근대식 호텔이라는 점에서 커피를 판매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최초로 판매된 것은 언제일까. 최근까지는 1902년 정동 29번지에 문을 연 손탁호텔에서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다는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는 사실일까?

조선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사진 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어진 3층 건물이 대불호텔이다. 경인선이 놓이기 전 제물포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인천에서 하룻 밤 숙박을 한 후 서울로 향해야 했고, 대불호텔은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손탁호텔보다 앞선 1888년 개항지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이다.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조랑말을 타고서도 한나절이 걸렸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옛 제물포)을 통해 조선 땅을 밟은 이방인들은 인천에서 묵어야만 했고, 대불호텔은 이런 수요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일본 해운업자가 현재의 인천 중구 중앙동에 세운 이 호텔은 서양식으로 설계된 3층 벽돌 건물이었다.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고, 침대가 딸린 객실 11개와 다다미 240개 규모였다.

대불호텔에 대한 기록

배재학당을 세운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비망록 「한국에서 우리의 사명Our Mission in Korea」에서 1885년 4월 5일 처음 인천을 방문해 일주일간 머물렀던 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호텔 방은 편안할 정도로 넓었다. 테이블에 앉자 잘 요리되어 먹기 좋은 서양 음식이 나왔다.”

이에 앞서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운영하는 호텔은 없지만, 일본인이 운영하는 호텔이 있다고 들었다. 짐을 들게 하기 위해 손짓으로 막노동꾼을 불렀고, (그곳으로) 출발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머물렀던 호텔은 대불호텔이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888년 건물을 3층으로 개축하기 이전 이미 대불호텔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에 대불호텔 설립 시기를 1885년 이전으로 보는 주장도 가능하다.

영국인 화가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A.H. Savage Landor가 저술한 책「고요한 아침의 땅,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도 대불호텔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1890년 제물포에는 세 개의 유럽식 호텔이 있었는데 그중 다이부쓰 호텔(대불호텔의 일본식 발음)을 나의 근거지로 잡았다.”

메뉴판 등 유물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불호텔에서 커피가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지만 서양식 식사가 제공된 호텔인 만큼 커피가 판매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대불 호텔의 현재

건물이 헐리고 그간 주차장으로 사용되어 오던 대불호텔 터는 상가 건물 신축을 위한 공사중 기단이 발견되면서 극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현재 대불호텔터는 사유지로 묶여 있어 보존과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불호텔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경인선 개통으로 숙박수요가 감소하자 경영난에 직면한 대불호텔은 1918년 중국인에게 인수되어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로 간판을 고쳐 달게 된다. 이후 전국 3대 중국집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1978년 건물이 헐린 후 최근까지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

대불호텔 터는 상가 신축을 위해 터파기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옛 기단부가 발굴되면서 현재 공사가 중지된 채 방치되어 있다. 커피사와 근대사에 있어 주요한 문화유적이지만 개인 소유 부지로 묶여 있어 보존과 복원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지역 사학계와 시민단체에서 호텔 복원을 촉구하고 있고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 역시 매 년 대불호텔 터를 찾아 보존과 복원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세우지 못하고 있다.

앙투아넷 손탁과 황실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다는 명확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치외교의 중심공간인 정동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특성과 서양인과 외교관, 정치인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상황을 볼 때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 알사스 지역 출신 앙투아넷 손탁Antoinett Sontag(1854-1925)은 한국 커피역사의 태동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적 장소 손탁호텔을 운영했던 인물이다.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1)으로 서울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그녀는 독. 불 접경지역 알사스 지역출신답게 독일어, 불어, 영어가 능통했으며 조선에서 10년을 지낸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이미 우리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의 외모와 품성 그리고 행적에 대해 표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손탁 양이 경성에 왔던 때는 32세였다. 그 온화한 풍모와 단아한 미모는 경성외교단의 꽃이었다. 경성에 와서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그녀는 베베르 공사의 추천에 따라 민비에 소개되었고, 왕궁의 외인접대계外人接待係에 촉탁되었다. 자주 민비에게 불려가서 서양요리 이야기와 음악. 회화와 관련한 이야기 등을 아뢰었다.” -키쿠치 켄조菊池謙讓, 「조선잡기朝鮮雜記」,제2권, 鷄鳴社, 1931

“뒤이어 누차 왕비에게 불려가서 서양사정에 대한 얘기 상대가 되었다. 그녀는 재기 발랄하여 영, 불어 및 조선어에 숙달하여 왕비는 물론이고 드디어는 고종마저도 안내 없이 지척에 갈 수 있기에 이르렀다.” -경성부, 「경성부사」, 제1권, 1934 (651-654쪽)

1902년 손탁은 정동 29번지에 2층의 러시아식 건물을 짓고 호텔을 개업한다. 이로써 격랑의 근대 역사의 현장 손탁호텔이 탄생하였다. 얼마 전까지 손탁호텔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처음 커피를 판매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불호텔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최초의 커피 판매점이란 호칭은 잃어버렸으나, 한국 근대사와 커피사에서 손탁호텔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손탁은 고종의 절대적 신임 아래 외교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녀를 중심으로 각종 정치세력과 외교관들이 모여들었다.

손탁호텔은 자연스레 정치와 외교의 주무대가 되었다.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다는 명확한 기록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상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서양의 문물에 익숙한 한국의 유력 정치인과 명망가, 그리고 외국인들의 사교의 장이었고 황실의 손님이 주로 묵는 숙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손탁호텔에서의 커피 판매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다른 견해들

손탁호텔 외부 전경. 손탁호텔은 정동 29번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정동의 외교관과 서양인들, 고관들의 사교 공간이자 외교의 장이었다.

손탁은 고종의 절대적 신임 아래 외교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녀를 중심으로 각종 정치세력과 외교관들이 모여들었다. 손탁호텔은 자연스레 정치와 외교의 주무대가 되었다.

손탁호텔을 두고 우리나라 혹은 서울(당시는 한성)최초의 서양식호텔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1902년 손탁호텔이 문을 열었을 당시 이미 서울에는 대안문(지금의 덕수궁 대한문)앞에 팔레호텔Hotel du Palais이 서대문역 앞에 스테이션호텔Station Hotel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서양인 주인을 두고 서양식의 건물에 서양의 음식을 판매하는 근대 서양식 호텔이었다. 따라서 손탁호텔이 서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백과사전에 이런 언급이 있다. “손탁은 1885년 초대 한국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함께 서울에 도착해 베베르 부부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양식 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배후에서 활약하다가 1895년 고종으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외국인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 손탁호텔 [두산백과사전]

위의 내용 중 손탁이 고종으로부터 가옥을 하사받아 후에 서양식 호텔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손탁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어한 1897년 2월 직후 인 1898년 3월 손탁에게 건물을 내리고 노고를 치하한다.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쪽 편에 황실 소유의 방 5개가 딸린 벽돌건물塼屋 한 채를 손탁에게 상으로 내려, 이로써 그 노고를 치하한다’ – [구한국외교문서] 권 18, 아안(俄案) 2.

그런데 이 하사받은 벽돌건물 한 채는 지금의 손탁호텔 표석이 있는 정동 29번지(1,184평)가 아니라 정동 16번지(418평)로, 현재의 신축 캐나다 대사관 위치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정동 16번지와 29번지의 소유자가 모두 손탁이었다는 사실과 – [경성부관내지적목록] 1917,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쪽 편’ 이라는 기록에 비추어 보면 하사받은 건물은 공사관 맞은편의 손탁호텔 터가 아닌 현 캐나다 대사관 건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손탁호텔 터는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가 10년여를 살던 집으로 1896년 손탁이 사서 1902년 10월에 호텔 문을 열었다. 다시 말해 손탁호텔은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가옥이 아니라 사서 새로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인 의사로 1901년부터 4년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시의를 지낸 리하르트 분쉬Richard Wünsch(1869-1911)가 그의 부모님께 쓴 1902년 4월 9일자 편지2) 에 손탁의 집에서 자주 저녁을 먹는다는 언급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1902년 당시 한창 공사 중이었던 손탁호텔이 아닌 하사받은 정동 16번지에서 식사를 했을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정동 16번지, 고종에게 하사받은 집은 손탁호텔이 아닌 손탁의 사택이었고, 후대에 이와 같은 사실관계가 혼동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사와 커피의 조우

손탁호텔 건물은 이화학당에 팔린 후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22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건축된 프라이홀 마저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버려 현재 손탁호텔의 옛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손탁호텔 터 표석은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당시는 조선왕조의 전통질서와 서구 열강의 근대문명이 곳곳에서 충돌하는 급변기였다. 개화문물의 틈에 끼인 커피는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타고 이곳 손탁호텔까지 흘러 왔으리라.

표석 맞은 편으로 하마비下馬碑가 덩그러니 서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으라는 뜻을 새긴 비석으로, 황제와 황궁에 대한 경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황제의 커피 사랑을 떠 올린다.

참고문헌
  • H. G. Appenzeller, [Our Mission in Korea]
  • W. R. Carles, [Life in Corea] (Macmillan and Company 1st Edition, 1888)
  • H. B. Helbert,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2006)
  • 김남수 외 4인 역음, [100년 전의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0)
  • 박경룡, [정동, 역사의 뒤안길] (상원사, 2008)
  • 이상각, [꼬레아 러시] (효형출판, 2010)
  • 손정숙, [한국 근대 주한 미국공사 연구] (한국사학, 2005)
  • 국사 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 근대외교사 연표]
  • <향토서울> 제 56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6)
  • 김원모, ‘손탁양의 친러반일운동’, <한국사연구휘보> 제 80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