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커피의 역사] 한국인 최초의 다방, 경성에 문을 열다

Posted on 2014년 11월 13일 Under archives

한국인 최초의 다방, <br>경성에 문을 열다. 커피, 상업화의 길을 걷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09년 남대문역 다방이다. 그러나 남대문역 다방은 일본인이 설치하고 운영한 다방이었다. <br>그렇다면 한국인에 의해 운영된 최초의 다방은 어디일까. 진정한 우리 다방의 역사는 언제 처음 시작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명동과 충무로를 위시한 남촌은 일본인 상권 하에 놓이면서 경성의 유흥과 문화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시대 다방은 남촌을 중심으로 출현,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한성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도심 한복판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일본 영사관을 신축 이전하면서 그 기세는 더욱 강성해졌다. 경성 도심은 청계천을 가운데 두고 주로 일본인들이 사는 남촌과 조선인들이 사는 북촌으로 크게 나뉘었다. 남촌은 남산아래 지역 진고개-지금의 명동, 충무로, 필동- 지역을 일컬었고 북촌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인사동, 안국동, 삼청동 지역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남촌은 일본 상인들로 넘쳐났고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지역 상권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작일昨日은 양력으로 섣달그믐날이다. 일본사람이 많이 사는 경성의 남촌 진고개(本町-혼마치)는 큰 번창을 이루었다. 평상시에도 번창한 진고개의 좁은 길은 양편에 벌려놓은 세말 광고의 깃발로 더욱 좁아진 듯하다. 검은 옷 입은 남녀소소의 나막신 소리가 콩 볶 듯하며…,..<중략> 이와 반대로 조선인이 많이 사는 북촌에는 몇몇 귀족 집과 하이칼라 실업가 몇 사람을 제하고는 다 적적하여 명절인 듯도 싶지 않으며, 조선인에게 물건을 많이 파는 남대문, 동대문의 두 시장도 모두 한산하며, 중국인이 많이 사는 태평동 일정목에를 가 보아도 신년을 맞는 듯한 기분이 없이 적적하더라”
– ‘신춘을 迎하는 경성’, <동아일보> 1922. 1. 1

기사텐喫茶店의 등장과 번성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한 남촌에는 20년대 들어 다방(당시의 일본식 표기인 기사텐)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한다. 1920년에 이미 본정 2정목에 다리야 기사텐이 영업을 하고 있었고 1923년에는 이견二見 후타미가 문을 열었다.(후타미는 그동안 한국 최초의 다방으로 알려져 있던 곳으로 개업년도에 대해서는 23년 혹은 26년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 외에도 소구자 오키나, 금강산 등이 영업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 소유하고 운영하였다.

1920년대 본정 다방, 여환진의 논문 ‘본정(本町)과 종로: 재현을 통해본 1930년대 경성 “번화가”의 형성과 변용’중 표32 발췌 정리

카카듀는 현재의 인사동, 안국동 네 거리 나가는 길 못 미쳐 3층 병원의 1층 건물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다방은 남촌의 기사텐에 비해 늦은 1927년에야 등장하였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지금의 인사동에 문을 연 카카듀가 그것으로, 이로써 비로소 한국인이 경영하는 최초의 다방이 우리 커피사에 출현하게 되었다.

“그 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로에 맨 처음 낫든 다방은 구년 전 관훈동초 삼층벽돌집(현재는 식당부지가 되어있다.) 아랫층에 이경손씨가 布哇(포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과 더부러 경영하든 ‘카카듀’다.”
– 노다객, ‘경성다방성쇠기’, <청색지>, 1938. 5. p46-47

한국인 최초의 다방 출현하다

카카듀는 지금의 인사동, 안국동 네거리 나가는 곳에 위치했으며 이국적인 실내장식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전략)녯날 인사동 지금은 관훈정일게다. 안국동 네거리를 나갈려면 못미처 이길에 처음생긴 양옥집(옛날 이성용씨병원 밋층)에 ‘카카듀’라는 찻집이 생겻스니 이것이 서울의 찻집의 원조요 찻집의 야릇한 풍속의 시초다.”
– 안석영, ‘은막천일야화’, <조선일보> 1940. 2. 14.

“이집은 이씨의 데카당 취미를 반영하여 촛불을 키고 인도풍잠의 마포테블크로쓰에다 봉산탈춤의 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대신에 붉은 칠한 박아지 세쪽을 달아놓아 한 때 서울거리에 이채를 띠었다. ‘숙영낭자전’, ‘춘희’를 감독한 미형의 이경손과 하와이에서 살다왔다는 에그조틱한 여인과의 공동경영인 이 다방 ‘카카듀’는 그 무렵 젊은 사람들의 가슴을 타게 하는 곳이었다.”
– 이봉구,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 「세대」, 1964.

카카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국적조차 알 수 없는 이름을 둘러싸고 당시 사람들은 노서아어라느니 서반아어라느니 투우사의 애인이름이라느니 각종 추측을 쏟아내었다고 한다 .1) 이봉구는 위의 글에서 카카듀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나는 기어코 ‘카카듀’의 이름 뜻을 알고야 말았다. 이씨에게 직접들었다는 사람의 입에서 ‘카카듀’는 불란서 혁명때 경찰의 눈을 피해 모이는 비밀아지트인 술집 이름의 하나가 바로 이 ‘카카듀’라는 것이다.”

카카듀에서는 전람회나 문학좌담회 등의 문화예술 행사가 종종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9월 10일 톨스토이 탄생 백년을 맞아 외국문학연구회 동인들이 카카듀에서 간담회를 열고 톨스토이를 추억하는 좌담회를 가졌는가 하면2), 같은 해 9월 27일부터 이틀동안 개점피로예술포스터 전람회가 열리기도 하였다.3)

베일에 싸인 이경손의 생애

이경손은 배우, 영화감독, 다방 경영, 동화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한국 커피사와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지만 그에 대해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다. (출처: 매일신보, 1926. 12. 12)

카카듀는 영화감독 이경손과 하와이 출신의 여자 ‘미쓰현’이 공동으로 경영하였다. 이국적인 인테리어와 이경손이 직접 커피를 끓여 내오는 영업방식, 미쓰현의 미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나 얼마 못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카카듀를 운영한 이경손은 영화감독, 배우, 작가, 동화작가로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 신학교를 졸업하고 연극배우로 활동해오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해 배우 겸 조연출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한 춘사 나운규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이경손은 그의 첫 번째 감독작 ‘심청전에서 나운규를 주연으로 발탁한다.

카카듀의 문을 닫은 후 이경손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일을 돕다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태국으로 탈출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초대 한인회장을 지내고 국내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78년 생을 마감하였다. 이경손은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다방을 열고 춘사 나운규를 발탁하는 등 영화계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현재까지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그가 한국커피사, 영화사, 나아가 우리 문화예술사에 있어 선구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재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무관심 속의 카카듀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은 카카듀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매년 여름 한국커피역사탐험대와 함께 인사동을 찾고 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해버린 공간과 기록의 부재로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최초의 커피하우스 고히차칸의 옛 터에 세워진 표석과 설명문. 한국인 최초의 다방의 위치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일본은 최초의 커피하우스 자리에 표석을 세워놓고 자세한 설명까지 부착해놓았다. 커피 역사에 대한 양국간의 인식 차이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카카듀는 한국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이자 한국 커피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다방이다. 그러나 그 내외관이 어떠했는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 심지어 개업년도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남아있는 사진자료 한 장 없고 정확한 위치를 기록한 문서나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업년도에 대한 견해도 분분해 사람에 따라 1927년 혹은 1928년이라 제각기 주장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은 카카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기록을 발굴하기 위해 수 년 째 조사를 진행중이다. 해마다 8월이면 한국커피역사탐험 대원들과 카카듀에 관한 자료를 찾아 곳곳을 뒤지고 있다. 당시 인사동의 지적도를 찾아 확인하는 것은 물론 종로구청을 방문해 당시의 등기부등본을 일일이 대조하고 경희대 혜정박물관의 협조로 얻어낸 당시 고지도를 들고 무작정 인사동을 헤매기도 하였다. 한양대학교 건축과의 일본인 교수에게 부탁해 일본측 자료를 건네 받아 확인도 해보았고 일본에 건너갔을 것이라 추정되는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간다 고서점 거리를 몇 날 며칠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료의 미비, 커피업계와 학계의 관심 부족으로 아직까지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최초의 커피하우스에 대한 자료와 기록이 잘 정리되어 있고 옛 위치에 표석까지 세워둔 일본의 상황에 비하면 한국인 최초의 다방 카카듀, 나아가 우리의 커피역사에 대한 소홀함과 냉대는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멀지 않은 미래에 카카듀의 확실한 위치를 찾아 표석 하나 세워둘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도서
  • 김원모, [근대 한미 교섭사] (홍익사, 1979)
  • 노다객, [경성다방성쇠기] <청색지> 1938. 5
  • 안선영, [은막천일야화] <조선일보> 1940. 2. 14
  • 이봉구,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 (세대, 1964)
  • 고준환, [하나되는 한국사] (범우사, 1992)
  •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화 과정연구] (일지사, 1996)
  • 서울시립대 박물관, [조선 근대와 만나다] (2006)
  • 김영근, [일제하 일상생활의 변화와 그 성격에 관한 연구] (1999)
  • 전우용, [일제하 서울 남촌 상가의 형성과 변천] (서울학연구소, 2003)
  • 여환진, [본정(本町)과 종로: 재현을 통해본 1930년대 경성 “번화가”의 형성과 변용] (2010)